‘줄무늬 티셔츠’는 어떻게 내 여행 패션의 기준을 완전히 바꿔놓았나

2026.08.27

‘줄무늬 티셔츠’는 어떻게 내 여행 패션의 기준을 완전히 바꿔놓았나

프랑스를 여행하다 줄무늬 티셔츠를 한 벌 샀다. 19세기 프랑스 해군 갑판원들이 입었다고 해서 마리니에르(Marinière), 혹은 브르타뉴 지역 어부들이 입었다고 해서 브르통(Breton)이라 불리는 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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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매거진 독자라면 역사를 모를 수 없다. 1910년대 코코 샤넬이 브르타뉴를 여행하다 영감을 받아서 컬렉션에 등장시켰고 이후 피카소, 진 세버그, 오드리 헵번, 장 폴 고티에 등이 입었으며… 어쩌고저쩌고… 이 스토리는 정말이지 지겨울 정도로 들었다. 전 세계 디자이너와 에디터들 사이에서 봄/여름 시즌을 준비하다가 아이디어가 고갈되면 이걸 꺼내보라는 족보라도 도는 것 같다. 하지만 극도로 편한 옷이 필요한데 너무 캐주얼한 티셔츠는 곤란할 때 이만한 아이템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패션 매거진 마감일에 에디터 네 명이 일제히 브르통 셔츠를 입고 출근해 서로 낯을 붉히는 광경을 목격한 적도 있다. 그런데 이 티셔츠에 대해 우리가 잘 몰랐던 점이 하나 있는데, 종주국 프랑스의 패션 머글들이 이 옷에 대해 가진 인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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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국에서 프랑스인들과 어울려 지내게 된 후 나는 브르통 셔츠를 입을 때마다 상대가 반색을 하거나, 나를 놀려대고 싶어서 입을 씰룩거리거나, 원치 않는 패션 강좌를 시작하려는 걸 지켜봐야 했다. “프랑스 패션 역사라면 럭셔리와 패스트 패션을 비웃으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 미국 스트리트 웨어를 추종하는 너희보다 프랑스계 패션 매거진에서 일한 내가 더 잘 아니까 잔소리는 사양할게”라고 번번이 대꾸하기가 귀찮아서, 어느 순간부터 나는 브르통 셔츠와 거리를 두었다.

브르통 셔츠에 대한 프랑스 패션 머글들의 반응을 실감하려면 이런 상상을 해보자. 외국인 유학생 친구가 붉은악마 티셔츠를 입고 저녁 식사 모임에 나타난다. 해병대전우회 조끼도 좋다. 한국인이라면 그 옷의 문화적 배경을 설명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를 수 없을 것이다. ‘I Love NY’ 로고처럼 대놓고 관광객용도 아니고, 빨간색 마가(Make America Great Again, MAGA) 모자처럼 선언적인 무언가도 아닌데, 무슨 사연으로 저걸 입었는가 궁금하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붉은악마 티셔츠에는 태극기가 있고, 브르통 셔츠에는 프랑스 국기가 없다. 문화 배경과 무관하게 단지 예뻐서 브르통을 선택한 외국인들은 패턴에 국적을 붙이려는 그들의 태도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따라쟁이 취급을 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쁘기까지 하다. ‘아니 이건 너무 평범해서 원전이 의미 없는 문양이 아니냐고요, 당신들이 줄무늬 전세 냈나요, 우리 조상님들도 줄무늬 색동저고리를 입은 역사가 있고요…’ 변명하고 싶어진다. 하여간 현실이 이런데도 브르통을 입은 프랑스인을 만난다면, 그는 자국 문화의 상징을 착용하는 데 거부감이 없는 사람, 즉 보수적인 중산계급 이상의 인물일 확률이 대단히 높다. 혹은 사람들을 웃기려고 베레모와 양파 목걸이까지 맞춰 착용한 파티 애니멀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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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무늬 티셔츠가 프랑스인들에게 ‘조롱템’인 걸 그렇게 잘 알면서 내가 이걸 왜 샀느냐 하면, 그곳이 프랑스였고, 나는 “프랑스어 못합니다” 말고는 제대로 할 줄 아는 프랑스어가 한 문장도 없는 여행자였기 때문이다. 풍부한 맥락 속에 탄생한 정교한 자조는 고급 유머와 구별할 수 없는 법이다. 그 물건이 내 평생 본 것 중 가장 완성도 높고 소재 좋고 색감 좋은 브르통 셔���기도 했다. 하여간 나는 석 달 동안 프랑스를 여행하면서 매일 현지인들과 어울려야 했는데, 그 티셔츠는 늘 좋은 웃음거리가 되어주었다. 그것은 내가 말 안 하고 뚱하게 앉아 있어도 유쾌한 사람처럼 보이게 해주는 마법 망토였으며, 내가 이 나라 문화를 잘 이해하고 포용하고 이 여행을 즐기고 있음을 드러냄으로써 상대를 안심시키는 평화의 메시지였다. 그렇게 나는 여행지 사교용 티셔츠의 세계에 눈을 떴다.

이제 나는 유럽의 명품 아웃렛 구경보다 지역 기념 티셔츠를 사러 다니는 게 더 재미있다. 마르세유의 디자이너 숍에서 산, ‘이게 바로 마르세유야, 아가야!(C’est Marseille bébé)’라고 적힌 티셔츠는 나의 또 다른 마법 망토가 되었다. 해당 문장은 마르세유 지역 힙합 팀의 가사에 삽입되어 유행한 밈이고,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OM) 축구 팀의 승리 구호기도 하다. 티셔츠 한쪽에는 OM 로고도 슬며시 전사되어 있다. 외향적인 성격을 가진 젊은 현지인이라면 반드시 이 티셔츠에 반응을 보이기 마련이다.

완벽한 여행지 사교용 티셔츠는 중국에서 컨테이너 한가득 실어온 흔한 기념품과는 다르다. 그 지역 사람들이 그곳에서 만든 특색 있는 것이 좋다. 또한 일상에 돌아가서도 잘 쓸 만큼 기념품 티가 안 나지만 현지인이라면 알아보고 미소 지을 만큼 은은한 상징이 담긴 것이어야 한다. 내가 잘 모르는 상징은 손대지 않는다는, 프린트 티셔츠 수집의 제1원칙은 물론 지켜야 한다. 완공된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보기 위해 들른 바르셀로나에서 축구 팬들이 꼭 사간다는 FC 바르셀로나 유니폼을 거른 이유도 그런 원칙 때문이다. OM 로고는 여차하면 요가의 ‘옴’이라고 둘러댈 수 있지만 축구도 모르면서 FC 바르셀로나 유니폼을 샀다고 누가 비웃으면 대꾸할 말이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줄무늬 티셔츠 한 벌 덕분에, 나는 패션의 새로운 효용에 눈을 떴다. 패션은 사교의 도구다. 여행에서는 특히 그렇다.

이숙명

이숙명

칼럼니스트

영화 잡지 <프리미어>, 패션 잡지 <엘르>, <싱글즈>에서 기자로 일했습니다. 2018년부터 발리에 거주 중이며 대중문화와 라이프스타일 칼럼을 주로 씁니다. 저서로는 <패션으로 영화읽기>, <혼자서 완전하게>, <사물의 중력>, <나는 나를 사랑한다>, <발리에서 생긴 일>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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